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가의 난 (문단 편집) == 절정 == ||<-10> 서진 시기 북방 이민족 분포도 || ||색||<#FF6347>||<#FAE7A6>||<#4169E1>||<#FF69B4>||<#00FA9A>||<#006400>||<#A0522D>||<#FF0000> ||<#9400D3>|| ||민족|| [[흉노]] || [[갈족]] || [[선비족]][* 붉은 글씨 왼쪽부터 [[독발부|독발선비]], [[걸복부|걸복선비]], [[탁발선비]], [[우문선비]], [[단부|단선비]], [[모용선비]]] || [[저족]] || [[강족]][* 붉은 빗금은 [[토욕혼]]. 군주가 모용부 선비족이기 때문에 빗금칠되었다.] || [[노수호]] || [[오환족]] || 파인 || [[고구려|고구려인]][* [[비류수 전투]]에서 [[관구검]]에게 잡힌 고구려인 포로들이 형양에 모여 생활했다. 그 외에도 285년에 [[모용부]] 선비족의 습격으로 포로가 된 [[부여]]인도 있었다.] || ||<-10> [[파일:서진시기북방객족분포도.png|width=550]] || ||<-10> 311년의 상황. '''낙양(▣)이 이민족에게 완전 포위된 상태.'''[* 고구려인처럼 세력이 작은 이민족의 경우, 무제 [[사마염]]의 이민족 유지 정책에 따라 그곳에 정착해 살게 한 것으로, 정치•군사적 능력은 거의 없었다. 낙양 포위에 큰 의미는 없고, 대륙 북방을 잠식한 선비족의 모습에 주목하면 된다.][* 고구려가 중국에게 큰 위협이 되기 시작한 것은 영가의 난이 일어나고 100년이 지난 뒤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광범위하게 정복해가며, 한반도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주변 이민족들을 복속시켜나갈 때였다. 영가의 난 전후만 하더라도 고구려는 다른 이민족들에 비해 세력이 약한 편이었다.] ||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연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유총은 [[석륵]](石勒)과 [[유요(전조)|유요]](劉曜), [[왕미(전조)|왕미]](王彌)의 군대를 집결시켜 낙양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유총은 과거 낙양을 한번 공략했다가 실패한 바 있어 이미 310년 10월부터 낙양 주변의 교통망을 철저하게 차단시켜 낙양을 완벽하게 고립시켰다. 회제 사마치는 이 시점에서야 탈출을 결심했으나 육로는 차단당하고, 수로는 이미 황하로 통하는 나루터가 장악당해 남은 배도 유총에 의해 모두 불타버려 '''빠져나갈 방법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311년 5월, 결국 낙양성에 유총의 군대가 들이닥쳤고, 서진군은 유총을 비롯한 전조의 주요 인물들이 >'''12번의 전투를 모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란 언급을 할 정도로 용맹하게 싸웠으나, 이미 뒤집힌 전세를 어쩌지 못한 채 불과 1개월도 못 된 6월경에 낙양성이 함락되었다. 황태자이며 회제의 조카인 사마전을 포함한 30,000명이 살육되었고, 후한말 [[동탁]]의 낙양대겁탈 이래 다시 재건되었던 낙양은 약탈과 방화로 또다시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이때 궁전이 있는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왕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유요는 낙양을 깨끗이 태워버렸다.[* 그러나 왕미도 잘한 것이 없는 것이 비록 낙양을 태웠지만 나름의 군기를 유지한 흉노족보다 오히려 약탈이 극심한 부대는 흉노에 투항한 그의 한족 군대였다. 이들은 낙양이 폐허가 되기 전 민가를 약탈하고 서진의 역대 황릉들을 철저하게 도굴해 부장품들을 챙기고 파괴했다. 이 때문에 현재 낙양에 있는 서진의 황릉은 어느 것이 [[사마의]]의 것인지, 어느 것이 [[사마염]]의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심지어 이를 유요가 말릴 정도였으니 극심했을 것이다.] 회제는 체포되어 한나라의 수도 [[린펀시|평양]](平陽)[* 현재 산서성(山西省) 임분현(臨汾縣)]으로 연행되었다. 312년 유총은 회제를 회계공에 봉했는데 그를 연회에 초대했다. 사실 유총과 회제는 회제가 예장왕이던 시절에 서로 만났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유총은 아끼던 첩을 사마치에게 선물로 주었고 그 첩은 회계공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는데 313년 황실의 새해 맞이 행사에서 유총은 사마치에게 [[노예]] 복장을 입히고 고급 포도주를 들고 관리들을 접대하도록 했다. 원래 서진의 관리였던 [[유민(서진)|유민]]과 [[|왕준]]은 이런 굴욕적인 광경을 보고 감정이 복받쳐올라 크게 울고 말았다. 이것이 폭군 유총의 화를 돋워 유민과 왕준을 포함한 서진 출신의 관리들을 모두 반역 및 서진 장수 [[유곤(서진)|유곤]]에 대한 내통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형에 처하고, 이것은 결국 그들의 주군이었던 사마치에게도 옮겨붙어 결국 313년 봄에 회제는 독살당했다. 그리고 유총이 사마치에게 하사했던 첩은 도로 회수.(...) ~~줬다 뺏기~~ 여기까지가 좁은 의미의 영가의 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